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대부분의 유신론자는 종교를 따른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부터,
힌두교, 불교, 도교, 그리고 수많은 지역의 토착 신앙까지.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그러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반드시 조직화된 종교를 따른다는 뜻은 아니다.
종교적 체계를 거부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종교적 사고에 기댄다.
절대자의 심판, 사후세계, 윤회,
혹은 현실 너머의 이데아 세계를 상정하는 사유들은 모두 그 연장선에 있다.
반대로, 무신론자는 이 모든 종교적 환상을 부정한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은 단지 물리화학적 상호작용의 부산물일 뿐이며,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들은 유신론자에게 말한다.
“죽음 이후의 공허를 상상하지 못하겠다면,
꿈도 꾸지 않은 채 영원히 잠든 상태를 떠올려보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은 침묵하고, 사후세계는 증명되지 않았다.
인간이 그린 이데아는 상상의 거울에 불과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 곧 우주의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영원을 꿈꾼다.
그 영원함이 부재한 세계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식의 균열을 느낀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진실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류의 대다수는 신을 상정한다.
심지어 스스로 무신론자라 부르는 이들조차,
무의식 속에서는 신을 닮은 믿음의 구조를 재현한다.
인간은 그렇게 설계된 존재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진리를 탐구한다.
이 또한 생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다.
문제는, 진리와 신념이 대립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 모순 앞에서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한다.
어떤 이는 모순을 합리화하고,
어떤 이는 사유를 멈추며,
또 어떤 이는 그 괴리 속에서 고통스러워 한다.
아마 그래서 무신론적 성향은 유전적으로 불리했을 것이다.
이제 질문이 남는다.
만약 무신론적 세계관이 참이라면,
즉 신도, 사후세계도, 절대적 의미도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삶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목적을 서둘러 정할 필요가 없다.
영원 속에서는 모든 것이 유예될 수 있다.
그러나 무신론적 세계에서는 시간이 유한하다.
따라서 삶의 목적을 찾으려면 지금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은 우리를 따라잡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무신론적 세계에서는 삶의 목적 자체가 무의미하다.
목적을 찾는다 해도 그것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도 결국은 찰나의 허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은 이렇다.
삶의 목적 따위는 찾지 않는 편이 낫다.
인생은 단지 손을 씻을 때 흘러가는 물과 같다.
그저 잠시의 흐름, 생존의 관성일 뿐이다.
만약 살아남고자 한다면,
이런 문제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라.
그 어떤 철학도, 여러분을 구원하지는 못할 테니.
길가메시여, 무엇을 찾고 있는가
그대가 찾고 있는 불멸은 결코 얻을 수 없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그들에게 죽음을 주고
자신들은 불멸을 간직했다
그러니 길가메시여, 맛있는 걸 먹고
낮과 밤, 밤과 낮으로 즐거워하라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채워라
낮에는 환희로, 밤에는 만족으로 지내라
깨끗한 옷을 입고 깨끗이 씻어라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하라
아내를 품에 안아 웃게 하라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니